지름길을 버리고 에둘러 간 이유에는 분명 어떤 이름이 있으리라. 사람이 만든 길에는 이름이 붙기 마련이다. 이름 없는 산길에선 누구든 조난을 당할 수 있다. 그 길에 이름을 붙이고 설명해야만 하는 게 본인이라면 그게 누구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할 것이다. 고민을 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대부분은 잘 아는 길로 향한다. 안전하기도 하고. 하물며 서울엔 ...
죽다 살아난 그날 저녁에 은수는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었다. 교문을 등지고 큰길로 나가 왼쪽으로 빠져서 쭉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오르막과 가로등 불빛들, 그리고 마침내 보이는 은혜의 집. 맨 꼭대기에 위치한 주황빛 조명이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던 은수는 느리게 언덕을 올랐다. 달이 귀에 걸릴 것처럼 크고 낮게 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숨이 가빠...
치열하고 가슴 터질 듯 설레는 여름과 방학이 누군가에겐 다른 결로 흘러가는 시간일 수 있다. 무엇이든 잠깐의 틈이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균열이 생기곤 한다. 억지로 쌓은 것들일수록 그런 균열은 심해지고 커져서 결국엔 무너지는 법. 세상엔 그런 모래성이 몇 개나 있다. 이를테면 중노송동의 아이들 중에서도 그런 삶을 살아내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어질 상황의 단면...
부쩍 누군가의 얼굴을 자주 떠올리고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늘어놓는다면, 그건 명백한 호감의 신호. 세린은 그와 비슷한 류의 신호들을 알아차리는 데 취약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둘이 만나는 것도 몰랐지.” “야. 저걸 어떻게 알아? 너도 어쩌다 봤다면서!” “그건 그래. 이건 역시 은수가 문제인 거지? 그걸 어떻게 이렇게 꼬옹 꽁 숨겨?”...
“왜 망할 놈의 팝스는 꼭 6월에 하는 거야? 좀만 덜 더울 때 해도 되잖아!” “3월은 추워서. 4월은 벚꽃 때문에. 5월은 중간고사. 7월은 그야말로 찜통 장마고 인마. 빨리 뛰어!” 6월 중순으로 넘어갈 무렵. 점차 해는 높아지고 길어졌다. 그리고 전주 고등학교 1학년 1반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하루 종일 굴려지는 고난에 처하게 됐다. 운동장...
감정의 흐름을 느끼는 데엔 저마다의 편차가 있다. 누군가는 찰나의 단서만으로도 알아차리는 기민함을 가진 반면, 다른 누군가는 눈앞에 증거를 내밀어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기 마련. 유정은 전자의 경우에 속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감정을 교류하는 일에 능숙했고, 순간의 감정들에 항상 솔직했다. 기쁘거나 즐거우면 웃고, 서럽거나 억울하면 울었으며, 화가 날...
학창시절이라 함은 으레 뭘 가르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앉아있는 날이 허다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족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게 무슨 수업이었는 지도 모른다. 은수는 애시당초 질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삐딱하게 앉아서 종이 한구석에 별볼일 없는 낙서만 끄적였고, 유정은 사전적 의미를 적어야할지 아니면 진실된 제 생각...
김유정 - 장마의 선인장 선인장은 봄과 가을에 왕성한 성장을 이룬다. 하지만 그동안 햇빛을 마음껏 받으라며 바깥에 방치를 해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선 안 되겠다. 그들은 빗물과 안개에 민감하다. 단단한 가시로 완전무장을 한듯, 그렇게 우직허니 서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사실 아주 약간의 습함만으로도 금세 썩어버리고 마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수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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